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마을소개

맑고 깨끗한 동해의 보석, 고성군 최고의 해수욕장

마을유래/발자취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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마을유래

문암1리 마을은 예부터 ‘만호리’, ‘망포리’, ‘망개리’ 등 여러 이름이 전해온다. 동쪽으로 동해바다, 서쪽으로 송암리와 야촌리, 북쪽으로 삼포리와 각각 이웃하고 있으며, 남쪽에는 문암2리와 토성면 교암리와 연결되어 있다. 본래 간성군 죽도면의 지역으로, 마을 입구에 돌문(石門)이 서 있어 ‘문바우’ 혹은 ‘ 문암(門岩)’이라 하였다고한다. 1812년 『간성읍지(杆城邑誌)』에 의하면, “문암(門岩)은 군의 남쪽 30리에 있다. 석벽 사이로 길이 있다 끊겼으므로 이름이 전해졌다. 수십 년 전에 한 승려가 낫자루 모서리로 이끼 위에 문암(門岩)이라는 두 글자를 썼는데, 지금도 없어지지 않았다.” 고 전한다.

지금의 문암리(門岩里)라는 지명을 사용하게 된 것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괘진(掛津)과 망포(望浦)을 병합하여 문암진리로 되었다가, 그 후 문암리로 고쳐 불렀다.

마을에는 마을이름과 관련하여 전해오는 설화가 있다. “삼국시대에 신라 유민들이 들어와 어업과 농업을 겸업으로 살고 있었으나 고구려의 영토 확장으로 고구려 군사들이 신라 땅인 이 마을을 침략하였다. 이 때 신라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장군이 이들과 맞서 치열한 싸움을 하였으나 갑작스런 침략과 힘의 부족으로 혼자 남게 된 장군은 이 곳 해안의 바다 밑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. 그러나 장군은 마을을 지키지 못하고 죽는 것을 한탄하였던지 장군이 죽은 자리에 난데없이 돌로 된 미륵돌이 생겨났다. 장군이 돌아올 날 만을 기다리던 고향의 부인은 장군이 전사했다는 소문을 듣고 이 곳을 찾아왔으나 기다리던 남편은 죽고 미륵돌만 남아 있었다. 비통함과 애절함을 참지 못한 부인은 바닷가 미륵돌 옆에서 밤낮을 슬피 울며 애통해하다가 기진맥진하여 죽게 되었다. 죽은 후에도 남편의 혼(魂)인 미륵돌을 지키지 못함을 안타까워 한 나머지 부인의 혼은 뱀이 되어 미륵돌을 지키게 되었다. 죽을 때 부인은 내가 죽어 뱀이 돼 미륵돌을 지킬 때 나를 해하지 않고 보살펴 주면 이곳 마을은 신라사람 만호(萬戶)가 거주하여 온 주민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.”고 하였다. 이 때부터 이 마을을 ‘만호리(萬戶里)’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. 또 다른 전설로는 바다의 고기떼를 망을 보았다고 하여 ‘망포리(亡浦里)’라고 하였다고 한다. 속설로는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부락 앞에 개(浦)가 있고 개울을 바라보는 부락이라 하여 ‘망개’라고 불렀다고 한다.

(참고자료 : 강원특별자치도, 1995, 『강원 어촌지역 전설 민속지』 : 고성군, 1998, 『고성군지 : 고성향토문화연구회』, 2012, 『풍암』, 제 2호)

발자취

선사시대
  • 신석기시대 초기~중기 주민 정착(B.C.6000-3000), 마을 형성, 어로 및 농경생활, 동아시아 최초 신석기시대 중기의 밭경작지 발견(고성 문암리유적 : 사적 제426호)
  • 철기시대 주민 정착생활 지속(문암리 철기시대유적)
  • 동예의 일원에 속함
삼국시대
  • 고구려의 수성군 혹은 가라홉 영역에 속함
  • 신라 진흥왕때 신라 영역에 속함
  • 동예의 일원에 속함
고려시대
  • 간성군에 속함
조선시대
  • 간성군 죽도면에 속함. 괘진리로 불림
일제강점시
  • 1910년 간성군 죽도면 망포리로 불림
  • 1914년 간성군 죽왕면에 속함. 괘진과 망포를 병합하여 문암진리가 됨
  • 1919년 양양군 죽왕면 문암리로 됨
해방이후
  • 1954년 문암리를 문암1리와 문암2리로 분리
  • 1963년 양양군에서 다시 고성군에 편입, 죽왕면 문암리로 됨
  • 1976년 7월 10일 백도해수욕장 개장
  • 1980년 5월 29일 국민관광지 지정(강원특별자치도 공고 제91호)
  • 2001년 2월 5일 고성 문암리 선사유적 국가사적 제426호로 지정